치매, 이길 수 있는 전쟁] (2) 빨라지는 '치매 시계'… 호주 크리스틴씨의 치매 극복기

46세때 치매 걸린 IQ 150의 그녀, 뇌 운동하며 치매와 18년째 同行조선일보|브리즈번|입력2013.05.03 03:23|수정2013.05.03 10:23

올해로 18년째 "치매와 함께 여행한다"고 말하는 호주 여성이 있다. 1995년 치매 진단을 받은 크리스틴 브라이든(여·64)이다. 치매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호주 과학기술부 제1차관보였다. 치매를 앓으면서도 1998년 투병기를 담은 책 '치매와 함께 떠나는 여행'을 펴냈다. 이후 크리스틴은 호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치매를 주제로 강연하며 치매 환자들의 희망이 됐다.

↑ [조선일보]지난 2월 호주 브리즈번에서 ‘치매 환자’ 크리스틴 브라이든과 그의 남편 폴이 인터뷰를 마친 뒤 주먹 쥔 손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감혜림 기자

지난 2월 본지 취재팀은 호주 브리즈번에 있는 크리스틴의 집에서 그와 그의 남편 폴을 만났다. 4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크리스틴의 친구 웬디 크루델(51)도 함께했다. 크리스틴과 웬디는 함께 점심을 준비했다. 오븐에서 빵과 파이를 데우고, 치즈를 접시에 옮겨 담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두 사람에게 "치매 환자 같지 않다"고 하자 그들은 "치매 환자는 집안에서 웅크리고만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크리스틴은 "평소 자주 책을 읽거나 퍼즐을 맞추면서 지속적으로 '뇌 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말이 끊어지기도 했지만,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폴은 "다만 아내가 운전이나 대화 등 강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을 하고 나면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현재 크리스틴의 뇌는 일반인의 70% 수준까지 쪼그라들었다. 뇌의 위축 정도를 경도·중등도·고도로 나눌 때 중등도에 해당한다.

크리스틴은 46세 때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그는 지능지수(IQ) 150에 유명 대학 MBA 출신의 고위 관리였지만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매일 10시간 넘게 일하면서 야근이 잦았고, 가정 폭력이 심했던 전 남편과는 이혼해 딸 셋을 혼자 키웠다. 크리스틴은 '머리가 안개로 가득 찬 것' 같은 두통과 건망증이 3년간 계속되자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전형적인 알츠하이머 증세"라며 "통상 치매 진단을 받은 지 8년 내에 사망한다"고 했다.

"일을 그만두라"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그는 진단 6개월 만에 사직했다. "처음엔 치매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차라리 암이길 바랄 정도였다"고 말했다. 크리스틴의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어린 시절 팔이 부러진 추억을 얘기하던 딸이 "그때 몇 살이었지?"라고 묻자 "네 시 반이었어"라고 답했다. 단어가 생각 안 날 때는 다른 단어를 열거하거나 몸짓으로 설명했다. '우편함' 대신 '우표를 붙인 편지가 들어가 있는 상자'라고 말하는 식이다. 짜증도 부쩍 늘었다. 가끔 이유 없이 눈물도 흘렸다.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이웃집의 요란한 파티 때문에 시끄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크리스틴은 "그때 그동안 일이 바빠 제대로 해주지 못한 엄마 역할을 치매 때문에 영원히 해주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딸들은 크리스틴이 '치매와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돼줬다. 딸들은 "함께 치매를 이겨내자"며 크리스틴을 위로했다. 집안일을 도우며 매번 엄마 약을 챙겼고, 엄마와 자주 외출하면서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크리스틴은 '딸들과 행복한 노년'을 위해 치매와 맞서기로 했다. 일기장에 일주일치 일정을 미리 적어두고, 수시로 열어보면서 계획을 세웠다. 제때 약을 먹기 위해 알람을 맞춰놓고,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훈련했다. 치매 진단 3년 후 소개팅으로 폴을 만나 재혼했다. 폴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자, 폴은 "우리 아버지도 치매였다"며 개의치 않았다. 폴은 아내를 무조건 돕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크리스틴은 컴퓨터도 곧잘 다룬다. 이메일을 직접 확인하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답장도 보낸다. "치매 환자는 최근 기억을 잘 잊는 편인데, 컴퓨터 자판은 누르기만 하면 글자가 적히고 맞춤법 검사도 돼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최근엔 태블릿 PC를 자주 이용한다. 부부는 개 한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이들은 "개나 고양이를 만지면 안정감이 생기고 뇌도 쉴 수 있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크리스틴과 폴은 치매 환자를 위한 활동에도 나섰다. 2001년부터 뉴질랜드·캐나다·일본·한국 등 7개국을 찾아 강연했다. 크리스틴은 2003년 최초의 치매 환자 출신 국제알츠하이머병협회 이사로 선출됐고, 치매 환자 지지 모임도 만들었다. 폴과 결혼 생활을 담은 두 번째 책을 낸 크리스틴은 요즘 세 번째 책을 쓰고 있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